“세상에 태어나 죽기 전에 원하는 집을 한번 지어보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판교 주택은 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노부부를 위한 집이다. 고희를 맞아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는 오랜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맘에 드는 정원이 딸린 주택을 짓는 것을 인생의 중요한 마무리로 여겼다. 건축주는 마당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아파트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단독주택의 넉넉함과 낭만이 어우러지길 희망했다.
아파트와 같은 집합단지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탓에, 대부분의 건축주들이 새로 집을 짓고자 할 때 늘 의구심을 갖는 부분은 난방과 유지관리 문제이다. 판교 주택은 합리적인 유지비용으로 시간의 나이테를 쌓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집이 되도록 하여 건축주의 우려를 해소하였다.
판교주택은 동남향의 넉넉하고 아늑한 마당을 두고 판교지구단위계획을 고려해 “ㄷ”자 모양으로 앉혀졌다. 96평의 좁고 긴 장방형의 비교적 넉넉한 대지는 도로와 삼면을 접하고 있다. 동남쪽 장변방향에 두 개의 필지와 면하고 있었는데, 판교지구단위계획에 의해 조성된 공유외부공지가 두 필지 사이에 위치하여 다소 시선의 여유가 확보되었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도 활용도 높은 볕이 잘 드는 마당을 계획하는 것이 우선되었다. 여기에 건축주의 요구사항인 옥내 주차장과 판교지구단위계획의 1층 벽체 지정선이 배치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주택에 있어 진입부에서부터 기분 좋은 첫인상을 만드는 작업은 중요한 일이다. 판교주택은 마당과 수공간이 만드는 극적인 공간적 대비를 계획하였다. 도로에서 바로 진입하는 현관을 지나 홀에 들어오면 백일홍이 있는 마당과 수공간이 펼쳐져 도시와 전원 사이의 드라마틱한 공간전환을 경험하도록 계획하였다. 맑은 날 수공간에 반사된 빛들이 천장에 아른 거리며 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첫인상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거실과 식당은 마당과 마주하며, 야외 테이블이 있는 데크 공간을 연결시켜 마당으로의 확장성과 사용성을 높였다. 계단을 부담스러워하는 노부부를 위해 1층에 배치된 주인침실에서는 자연스럽게 수공간 너머의 마당을 길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차에 애착이 많은 건축주를 배려하여 주차장은 필로티로 계획하고, 부출입구를 두어 생활의 편의성과 동선의 융통성을 확보했다.
2층에는 건축주의 서재와 패밀리룸, 그리고 아직 출가하지 않은 딸을 위한 공간으로 계획했다. 패밀리룸은 여유 있게 계획하여 추후의 공간 요구에 융통성 있게 대응하도록 하였다. 또한 포켓 테라스를 연결하여 외부와의 소통을 유도할 뿐 아니라, 공간 스케일에 변화를 주어 비교적 시원하게 정리된 다른 공간과 차별화된 느낌을 더했다. ‘날씨 좋은 날 데크에 앉아 기분 좋게 차를 마실 수 있는 한식 정원’과 같이 건축주의 필요와 상상력으로 채워질 여유를 준 것이다.
건축주가 사용할 서재는 주인침실과 마찬가지로 마당과 집 전체를 느낄 수 있도록 주차장 상부에 두었다. 딸을 위한 공간은 좌우가 모두 유리로 처리된, 마치 외부 공간 같은 긴 연결통로를 지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동선은 패밀리룸에서 이어지는 딸의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뿐 아니라, 딸이 출가 한 후 게스트룸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용 화장실과 루프가든을 두어 공간의 독립성은 더욱 높아졌다. 루프가든은 파라펫을 2m 높이로 올려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확보했다. 다소 높은 파라펫 벽은 벽돌을 비켜쌓아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하여 답답하거나 단조롭지 않게 하였다. 넉넉한 데크공간과 조경 공간은 계절에 따라 루프가든을 더욱 다채롭게 할 것이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의도를 담은 건축주의 진지한 자세는 설계를 하는 건축가에게 부담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설계를 진행하면서 가능한 많은 대화와 이해를 통해 건축주와 비슷한 느낌의 집을 설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계가 진행되는 동안 건축주에게 받은 일관된 인상은 “합리적 실용주의”다. 사회적 통념에 쉽게 순응하지 않고 많은 부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성향의 건축주를 대하면서 초기부터 이 주택을 당당하고 격이 있는 집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생활의 편리성이 충분히 고려된 공간 질서를 바탕으로, 화려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지만 당당한 품격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공간 구축, 재료, 디테일을 포함한 이 집의 모든 부분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주택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공간 질서와 건축어휘로 건축주의 자서전을 쓴다.”